숙빈 윤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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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개요
숙빈 윤씨는 조선 인종의 후궁으로, 돈녕도정을 지낸 윤원량의 딸이며 문정왕후의 조카이다. 1537년 양제로 입궁할 당시, 세자의 모후의 조카이므로 후궁으로 삼을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이 있었으나, 입궁하였다. 1595년에는 이미 숙빈으로 봉해졌으며, 소생은 없었다. 불화 《지장보살본원경변상도》를 발원하였고, 2002년에는 언문 편지가 발견되어 한국어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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숙빈 윤씨 - [인물]에 관한 문서 |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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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본 정보 | |
작위 | 인종의 후궁 |
배우자 | 인종 |
아버지 | 윤원량 |
어머니 | 순천 장씨 |
출생일 | 미상 |
사망일 | 1595년 음력 5월 이후 |
2. 생애
조선 인종의 후궁으로, 아버지는 돈녕도정을 지낸 윤원량이고, 어머니는 순천 장씨이다.[1] 윤원량은 인종의 계모인 문정왕후의 오빠로, 숙빈 윤씨는 문정왕후의 친조카가 된다.[2] 본관은 파평이다.
언제 숙빈(淑嬪)으로 진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,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5년(선조 28년)에는 이미 숙빈으로 봉해져 있었다. 이때 남양[6]에서 윤씨에게 음식물을 지급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[7], 그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. 소생은 없었다.[1]
2. 1. 입궁 과정
인종이 세자이던 1536년(중종 31년) 음력 2월, 세자궁의 후궁을 선발하기 위해 윤씨에게도 금혼령이 내려졌다.[3] 1537년(중종 32년) 음력 11월에 양제(良娣)로 선발되어 입궁하는 것이 논의되었다. 금혼령이 내려졌을 때부터 일부에서는 윤씨가 세자 모후의 조카이므로 후궁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나, 윤은보 등은 한명회의 두 딸이 나란히 예종비 장순왕후와 성종비 공혜왕후로 책봉된 예를 들면서 문제가 없다고 하여 입궁하게 되었다.[4] 1543년(중종 38년) 인종의 전각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는데, 이를 두고 윤씨의 친정에서 저지른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.[5]2. 2. 후궁 생활
인종이 세자 시절인 1536년(중종 31년) 음력 2월, 세자궁 후궁 선발을 위해 윤씨에게 금혼령이 내려졌다.[3] 1537년(중종 32년) 음력 11월에는 양제(良娣)로 선발되어 입궁하는 것이 논의되었다. 금혼령이 내려졌을 때부터 일부에서는 윤씨가 세자 모후의 조카이므로 후궁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나, 윤은보 등은 한명회의 두 딸이 예종비 장순왕후와 성종비 공혜왕후로 나란히 책봉된 예를 들며 문제가 없다고 하여 입궁하게 되었다.[4] 1543년(중종 38년) 인종의 전각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는데, 이를 두고 윤씨의 친정에서 저지른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.[5]이후 언제 진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, 적어도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5년(선조 28년)에는 이미 숙빈(淑嬪)으로 봉해져 있었다. 이때 남양[6]에서 윤씨에게 음식물을 지급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[7], 윤씨는 그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. 소생은 없었다.[1]
2. 3. 불교 귀의와 언문 편지
명종비 인순왕후가 승하하자, 1577년(선조 10년)경 윤씨는 비구니 지명과 함께 불화 《지장보살본원경변상도》를 발원하였다. 윤씨가 발원한 불화는 자수궁정사에 봉안되었으며, 현재는 일본 교토부 지온인에 소장되어 있다.[8]2002년 9월 파평 윤씨 종중의 산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, 이 중에는 적어도 1566년(명종 22년) 이전에 작성된 윤씨의 언문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. 편지는 극존칭으로 작성되었으며, 인종과 오빠 윤소의 죽음에 대해 쓴 것이다. 이 편지는 한국어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.[2][9]
3. 가족 관계
(시동생)
(재위 1545~1567)
(재위 1469~1494)
(재위 1506~1544)
(재위:1544~1545)